해후(邂逅)
따뜻한 봄볕에 바람이 쌀쌀한 한 낮이었다.
갸름한 얼굴에 깊게 파인 주름, 그는 큰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흰 머리에 많지 않는 머리 숱, 그도 나와 같이 긴 세월의 흔적을 얼굴에 담고 있었다. 나도 금방 그를 알아 보았다. 아니, 약속 장소에 나타난 사람이 그 일 것이라는 짐작 때문이었다. 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손을 잡았으니까. 반월당 부근 백화점 앞 의자에 앉아 두서없는 얘기를 주고받았다. 어린 시절 함께 뛰 놀았던 고향의 넓은 강, 푸른 하늘, 쏟아지는 달빛 아래에서 그와 뛰놀았던 추억들이 스쳐갔다.
나와 그는 같은 마을에서 살았다. 우리들의 집 뒷동산에는 수십 년 된 소나무들이 있고, 언덕에는 산딸기 숲이 있는 외진 곳이었다. 집을 나서면 맑은 강물이 흐르고, 하얀 백사장이 끊임없이 펼쳐졌다. 그의 아버지는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며 이발을 해주며 생활했다.
62년 어느 날, 그의 가족들은 아버지의 빚으로 마을을 떠났다. 도시생활 시작부터 생활고에 허덕였다고 했다. 고향을 떠난 3년 후 나는 대구 골목길에서 구두를 닦는 그를 만났다.
모두가 삶이 어려웠던 60년대 초, 시골 아이들은 학교 수업이 끝나면 모두 모여 산과 들을 쏘다니는 것이 일과였다. 어린 강아지를 데리고 토끼 사냥을 다니고, 여름이면 온 종일 강가에서 놀고, 밤엔 강변에 모여 씨름, 술래잡기 놀이에 세월 가는 줄 몰랐다.
“형! 내 머릿속에는 언제나 어릴 때 추억으로 가득해, 지금도 자주 그 추억들이 생각 나곤해, 며칠 전 꿈에서도 형이랑 같이 놀았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어. 내 젊은 시절 중에서 행복했던 추억은 없어. 언제나 10살 전 어릴 때 기억밖에 없는 거지,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말이야, 그는 유년기의 추억 속에 살고 있었다. “형, 그 당시 내가 구두를 닦고 있는데, 구두 통 앞에 운동화가 보이는 거야. 구두 닦을 사람은 아닌데 하고 위를 쳐다보는데 형이 서 있었어, 반갑기도 하고 부끄러웠어” 그는 47년 전 만났던 그 날을 기억했다.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을까,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눈 후 전철에서 각자의 길로 갔다.
그는 살아오면서 가족외에 사람을 사귀고 대화를 하는 일이 없었다고 했다. 어린나이에 온갖일을 겪으면서 사회로부터 상처를 받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엔 원망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착한 아이였으니까.
헤어지면서 그의 핸드폰에 내 번호를 입력해 주었다. 폴더를 젖히자 화면에는 아내와 아들. 딸 세 식구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정두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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