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들었다. 당쟁으로 점철된 정치 환경에서 아버지를 잃었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 한 사람들은 그를 죽여야 했다. 아버지를 죽인 할아버지와 그를 지켜 준 충신덕분에 그는 살았다. 그리고 임금이 되었다.
그가 만든 규장각은 문화정치의 산실이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책이기도 했다. 그는 규장각을 통해 실력 있는 서얼출신들에게 조정 진출의 기회를 줬다. 능력과 학식 중심사회의 기틀을 잡고자 했다. 규장각을 통한 문화정치, 인재양성은 그의 큰 업적이었다. 그의 문화정치는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 등 거장들을 낳았다.
정조는 1800년 재임 24년, 49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그의 문화정치도 막을 내렸다. 나라를 위한 일에 에너지를 소모한 탓일까. 자식들은 부실했고, 그것은 수 십 년간의 정치혼란을 예고했다. 두 아들 중 한명은 일찍 죽고 셋째 부인이 낳은 순조가 대를 이었다. 정조의 삶은 할아버지 영조에 비하면 너무 짧았다. 그의 이른 사망은 순조에게 수렴청정의 그늘을 만들었고, 대를 잇지 못한 순조는 이후 헌종. 철종에 이르는 세도정치의 부작용을 낳았다.
성군으로 남은 정조지만 아들 이후 이어지는 세도정치는 나라가 절망의 늪으로 빠져드는 단초가 됐다. 순조시대 안동 김씨들의 전행은 나라를 파탄지경으로 몰고 갔다. 어느 누구도 대적할 수 없었던 권력은 사회 기강을 무너뜨리고 왕조 사회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순조의 집권초기는 경주김씨 가문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15세 이후는 장인인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횡행 했다. 순조의 대를 이은 헌종도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라 다를 것이 없었다. 14년의 재임기간 중 9년의 수렴청정으로 그가 펼칠 정치 무대는 없었다. 스물셋의 나이로 후사 없이 생을 마감한다. 그를 잇는 왕은 철종이었다.
강화도령 철종 시대는 안동김씨 세도 정치가 절정을 이루고, 백성의 삶은 도탄에 빠지고 사회는 혼란 그 자체였다. 아무것도할 수 없었던 그는 술과 여색에 빠져 재위 14년 만에 33세로 죽는다.
정조이후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난 왕권의 이양은 왕조의 틀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국운이 기울어갔다. 안동김씨의 60여 년간의 세도정치는 나라의 근간을 흔들고 병들게 했다. 정조의 이른 죽음은 대로 이어지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거의 시대가 더 오래갔더라면 나라는 발전하고 후계도 제대로 이어졌을 것이다. 거의 죽음은 조선의 아쉬움이었다. 2018. 1.19 정두효
'역사와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자서 그리고 부차와 구천 (0) | 2018.08.07 |
---|---|
빈센트 반 고흐 (처절한 삶의 결실) (0) | 2018.05.30 |
태종 이방원과 당태종 이세민 (0) | 2018.04.06 |
충혜왕과 연산군 (0) | 2018.03.14 |
남한산성을 걸으면 (0) | 2018.0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