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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날은 천지에 꽃씨를 뿌리고 떠난다
에세이 스토리지

내 마음의 강물

by 옐로우 리버 2023. 1. 20.

‘수많은 날은 떠나 갔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가곡의 한 구절.

장마철 비가 쏟아지면 고향의 맑은 강물은 흙탕물로 변했다. 민둥산으로 가득했던 60년대, 나무와 풀이 연료였고 난방재료였다.
겨울이면 집집마다 헐벗은 산을 또 벗기며 연료 쌓기에 바빴다. 산의 나무가 남아날 수가 없었다. 흙탕물은 그런 산이 만든 것이었다.
도로는 비포장이었고 마을길도 그랬다. 홍수가 나면 신작로는 깊은 상처가 났다. 잘려 나가기도 하고 움푹움푹 파여 차들의 통행이 어려웠다.
군에서는 주민 동원령을 내렸다. 집집마다 한 사람씩 동원되어 도로를 복구했다. 대가가 없는 봉사였다. 국가 재정은 부족했고 스스로 고치지 않으면 주민들만 불편했다.
우리 집은 강에서 몇 십 미터밖에 안됐다. 마당에서 보면 강물이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넓은 강물은 흙탕물로 바뀌고 물은 굽이치며 읍내방향으로 흘러갔다.
마당 끝 다섯개 계단 중 한 개정도가 남으면 다른 집들은 이미 물이 들어찼다. 어떤 집은 부엌과 방까지 흙탕물이 넘실댔다. 논도 밭도 물에 잠기곤 했다.
어린 시절이라 그런 집들을 어떻게 복구 했는지 기억에 없다.
80년대 였던가, 홍수가 나고 서울 망원동 일부가 물에 잠겼다. 같은 직장에 다니던 동료의 집도 피해를 봤다. 수해복구 지원을 갔다.
지하실에 들어찬 진흙을 끄집어내는 일은 고역이었다. 50년대 시골집은 어땠을까. 몇 배나 힘들었을 것이다. 홍수는 연례행사였고 침수도 그랬다.
어떤 해에는 등교 후 비가 쏟아져 도로가 잠겼다. 멀쩡했던 도로가 물에 잠기면 집에 갈 수 없는 아이들도 있었다. 선생님은 학교주변 학생들에게 한 아이씩 데려가게 했다. 그러면 그 친구들이 우리를 그들의 집에 초대해 같이 놀기도 했다.
홍수가 오면 마을 안뜰에는 낙동강이나 주변 호수에서 올라온 큰 고기들이 물살을 갈랐다.
어른들은 가래로 고기 잡기에 바빴다. 나도 대나무 낚싯대를 들고 강 언저리를 기웃거렸다. 소득은 없었다. 호수로의 낚시는 괜찮았다.
흙탕물에서 찌가 움직이고 어떤 때는 붕어와 예쁜 색깔의 넙치가 잡히기도 했다.
홍수는 생태계를 뒤집고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종을 퍼뜨리기도 한다.
나일강의 범람으로 삼각주에 풍요를 가져왔듯이 홍수의 순기능도 있었을 것이다.
이수인 선생의 ‘내 맘의 강물’은 고향의 강이 생각나게 한다. 가곡에서의 의미 와는 다르지만 집 앞을 흐르던 강물은 언제나 내 마음 속에 있다.
옛날 모습과는 달라 졌지만 황강은 지금도 흘러 가고 있다. 정두효 / 2022.1.20

◇ 강의 모습은 옛날과 달라 졌지만 황강은 지금도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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