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이면 우리는 큰 집으로 차례를 지내러 가곤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가족모두가 길을 나섰다. 읍내까지는 어떻게 차를 타고 갔지만 그 다음 15리 길을 걸어 다녔다. 초등하교 시절엔 멀게만 느껴졌다. 그래도 그 길은 힘들고 지겹지만은 않았다. 오랜만에 부모와 함께하는 외출이고 신작로에 흩어져 있는 돌멩이를 차거나 뛰고 걸어 가는 여정이 재미도 있었다. 강변을 끼고 난 도로를 따라 가면 들판이 나오고 마을이 나왔다. 산을 돌아가면 꼬불꼬불 굽은 도로가 절벽에 걸처 있고 아래는 하얀 모래밭을 가로질러 푸른 강물이 흘렀다. '개비리' 라고 하는 절벽길이 끝나면 나환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있었다. 수 십 가구 마을은 꼬마들에겐 무서웠다. 평소 저녁이면 니환자들이 마을에 나타나 밥을 얻어가곤 했었다. 그 모습들을 보고 아이들은 겁을 냈다. 똑 같은 사람들인데, 어른들이 만들어낸 무서운 얘기도 한몫을 했다. 그곳 환자촌 마을 언덕에는 작은 구멍가게도 있었고 어른들이 사탕을 사준다고 해도 싫다고 했다. 그 마을 환자들이 쓰는 약은 인기가 있었다. 거의 모두가 미국등 서방선진국에서 지원되는 약이었고 효과가 좋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 곳을 지나면 강을 가로 질러 임시로 만들어진 나무다리를 건넜다. 다리는 겨울이면 만들어지고 늦 봄이면 철거됐다. 여름 홍수를 만나면 다리 재료가 유실되기 때문이다. 강을 건너 들판길 끝, 산모퉁이를 돌면 큰 집 마을이 보였다.. 들을 지나 언덕을 돌아가는 길엔 겨울 햇볕이 따스했고 들판의 보리밭은 언제나 푸르기만 했다.
동네에 도착하면 친척들의 정감 넘치는 환영이 있었다. 설날에 작은 할아버지 댁부터 시작되는 차례는 한나절이 되어 큰 집에 이르렀다. 차례상 앞에 늘어선 친척들은 많기도 했다. 찬 마룻바닥에 줄지어 차례를 지내지만 불평은 없었다. 차려진 음식들이 부족해도 공평하게 나눠 먹으며 행복했었다. 음식을 나누는 그 솜씨는 신의 경지였다. 그 시절 함께했던 어른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삼십 리길 큰 집 가는 길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설날이 좋았던 것은 친척들의 따뜻헀던 마음과 서로를 위해 주는 배려 때문이었던 것 같다. 정감 넘쳤던 어른들의 모습은 마음 한구석에 남아 떠나지 않고 있다.
때때옷 한 벌 입고 그렇게 즐거웠던 설날이 눈앞이다. 옛날하고 또 옛날의 설은 21세기 명절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정두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