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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날은 천지에 꽃씨를 뿌리고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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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접시꽃

by 옐로우 리버 2021. 7. 9.

어머니의 부엌 앞에는 이맘때면 접시꽃이 피곤했다.

부엌은 장마철이 되면 발목물이 들어찼고 매일 물을 퍼내야만 했다. 산언덕 끝자락에 있었던 부엌은 산에서 지표 밑으로 물이 흘러 들었다. 그나마 봄. 가을에는 덜 했지만 비가 오는 계절에는 고역이었다. 아들들이 초등학교에 다니고 딸아이도 하나 있었으니, 끼니를 거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도 엄마가 바쁠 때는 물을 퍼내곤 했다. 바닥이 젖은 부엌에 나무를 넣고 불을 지피는 일은 쉽지 않았다. 부엌과 방은 매캐한 연기로 가득했고, 연신 입으로 바람을 일으켜야 했다. 엄마는 독한 연기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밖에서 밥을 짓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당시는 1960년대 초반이었고, 여분의 솥이 있을 수 없었다. 또 무거운 무쇠 솥을 들고 옮겨 다니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엄마는 일본 히로시마에서 자라며 부엌일을 해본 적이 없었다. 16세에 한국으로 나와 17세에 결혼 하셨다. 엄마는 고국생활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언어도 통하지 않았고, 가난한 집에 시집왔으니  그 어려움은 더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우리집 부엌과 맞닿아 있는 아파트 벽에 누가 심었는지 모를 접시꽃이 피었다.

 

나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모른다. 모두가 원자폭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엄마는 히로시마 외곽에 있는 회사에 출근해서 살아 나셨고 부모의 고향으로 나오셨다. 우리형제들은 자라면서 부모를 떠나서 살았다. 어머니의 살아온 이야기를 많이는 들어보지 못했다. 그것은 불효 였다. 얼마나 힘들게 살아온 얘기들을 하고 싶어 하셨을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또 어땠을까. 참 바쁜 일생을 사시다가 돌아 가셨다. 어쩌면 원폭탄 후유증인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심은 접시꽃 3그루, 어머니는 접시꽃은 보며 많은 위안을 얻었으리라 생각된다. 부엌앞 접시꽃 매일 만나며 부모와 살았던 히로시마생활을 그리워하셨을 것이다. 히로시마 집 뜰에도 접시꽃이 있었으니까. 접시꽃을 볼때마다 나는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정두효 / 2021.7.9